나들이

[스크랩] 선녀와 나무꾼 1.

밥상 차리는 남자 2011. 12. 6. 12:20

 '선녀와 나무꾼'입니다.

 

 

철로에 서 있는 다향이를 보니 옛 대성리나 이제는 역 이름도 잊어버린

막걸리를 마시러 두 어 번 갔던 '화사랑'이 생각나기도 합니다.

 

 

추억의 포니자동차 앞에서.

 

 

옛 영사실을 보니 '시네마 천국'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.

 

장터 주막으로 보이는 곳에서 탁주를 드시는 할아버지들 사진이 정겨웠습니다.

 

 

빵집에서의 미팅. 우유병과 써니텐, 사이다 병.

 

 

찌그러진 양철그릇, 구멍난 고무신. 어릴 때 엿장수가 오면 뭐라도 갖다 주고 바꿔먹고 싶었지요.

 

 

텔레비전이 가보(?) 취급을 받던 당시. 얼마나 귀히 여겼으면 화면 앞에 여닫이 문까지 달았을까요?

 

 옛 전화기를 만져보는 다향이.

 

 

이 탄으로 밥도 지어 먹고, 난방도 했지만 이 탄가스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 또한 부지기수입니다.

언젠가 연탄파동이 일어났을 때 일인당 2장씩 밖에 연탄을 판매하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.

이발소를 운영하던 아버지는 남들보다 많은 양의 연탄이 필요해서 어머니와 나까지 앞세우고 줄을 섰었습니다.

 

요즘보다 날은 훨씬 더 차고, 입성이나 신발은 열악하고... 어둠이 걷히기도 전에 얼음길 위에서 발을 동동거렸습니다. 

 

 

농촌이 피폐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, 서울로 이주했고 부모님도 그 무리 중의 하나였습니다.

여동생을 포대기로 업은 어머니가 내 손을 붙들고 사글세 방을 얻으러 다니면 듣던 소리입니다.

"애들이 많아서, 시끄러워서..." 그렇게 문전박대를 당했던 어머니 마음을 이제는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.

 

 

처음 서울에 자리잡은 곳이 미아리 산동네였습니다. 그때 우리집 천장과 벽도 신문으로 채워졌지요.

벽지를 보면서 글자를 익히기 시작했고, 글이 눈에 익으면서부터는 신문이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는

소망도 가졌었습니다.

 

 

"빨리, 빨리..." 변소앞에서 몸을 비비 꼬면서 화를 내거나 사정하던 사람들...

지금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 갈까요?

출처 : `밥상차리는 남자`의 둥구나무
글쓴이 : 오성근 원글보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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